최초의 다큐멘터리, <북극의 나누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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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은 영화 역사에 있어 최초의 다큐멘터리에 대해 얘기해 보겠습니다. 로버트 플래허티 감독의 <북극의 나누크> 1922년 제작된 다큐멘터리입니다. 사실 이 작품 이전에도 물론 다큐멘터리 형식의 영화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 전에는 20분 내외의 짧은 기록 영화거나 뉴스릴 정도의 영상이었지 <북극의 나누크>처럼 어떤 민족지 형식으로 제작된 본격적인 "다큐멘터리 영화"는 아니었습니다. 아마도 뤼미에르 형제가 만든 최초의 영화 <열차의 도착> 역시 말하자면 최초의 뉴스 릴(reel)이자 "다큐멘터리"라고 부를 수는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짧은 형태의 클립(clip)이었지 로버트 플래허티의 영화처럼 일종의 사회적 필름 (Ethnography film) 형식을 갖춘 "작품"이라 부르기는 애매한 영화였습니다.

     

    당시 1900년대 초반에는 고스트 라이드 (ghost ride) 또는 팬텀 라이드 (Phantom Ride)라고 불리는 일련의 영화들이 영국과 미국의 대중들에게는 인기였는데, 대단한 것은 아니고 열차의 가장 뒷칸에서, 달리는 기차에서 보이는 풍경을 카메라 필름이 다할 때까지 촬영한 영상들을 그렇게 부른 것 같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dziGmOLe3KU&t=2s

     

    이러한 상황에서 로버트 플래허티(Robert Flaherty) <북극의 나누크> 1922년 처음 극장에서 일반 관객들에게 선을 보였는데요, 이전까지의 기록영화들이 길어야 20분 안팎이었음에 비해 무려 1시간 10분이라는 파격적인 분량의 영화가 나오자 대중들은 일단 이 영화에 대해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랐다고 합니다. 다시 말해 이 작품이 극장에 걸렸던 당시 일반 관객들의 기대치는 그다지 높지 않았다고 하는데, 이 영화를 처음 접했을 때 그 묘사의 디테일이나, 훌륭한 촬영과 편집 방식에 관객들의 반응은 기대 이상이었다고 합니다.

     

    <북극의 나누크>, 1922

    무엇보다 이제껏 잘 알지 못했던 북극에서 생활하는 이누이트(inuit)족의 일상이 너무도 자세히 기록된 것에 대해 대중들은 경의를 표했다고 합니다.

     

    <북극의 나누크>, 나누크와 그의 아들

     

    에스키모 원주민의 이국적인 생활양식을 매우 흥미 있게 묘사한 플래허티의 <북극의 나누크>를 본 당시의 영화 평론가 존 그리어슨(John Grierson)

     

    혹독한 자연 속에서 살아가는 북극의 에스키모의 삶을 생생히 묘사한 작품이라며 플래허티의 작품에 최고의 찬사를 보내기도 했습니다.

     

    죤 그리어슨 (1898  –  1972)

    죤 그리어슨은 로버트 플래허티의 두 번째 영화, <모아나, 1926>를 보고 다큐멘터리라는 용어를 최초로 사용하신 분이기도 합니다. 프랑스어 'documentaire[도큐몬테]에서 인용한 다큐멘터리라는 용어는 이후 기록 영화 장르 자체를 지칭하는 용어로 자리잡게 됩니다. (존 그리어슨은 또한 훗날 본인 자신도 두 편의 계몽 영화들을 제작한 다큐멘터리 감독이기도 합니다),

     

    <북극의 나누크>, 1922

    북극에 거주하는 에스키모 원주민의 삶에 대한 오랜 시간의 관찰을 담은 <북극의 나누크>는 인류학적 가치로 봤을 때도 매우 소중한 기록이며 미학적으로도 대단히 뛰어난 다큐멘터리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영화는 롱 테이크와 롱 쇼트, 클로즈업을 적절히 반복하며 촬영과 편집에서도 지금의 기준으로 봤을 때도 전혀 어색하지 않은 구성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어찌 보면 <북극의 나누크>는 오늘날 우리가 보는 독립 장편 다큐멘터리의 원형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해도 과언이 아닐 듯 싶습니다.

     

    로버트 J. 플래허티는 다큐멘터리를 제작한 후에 뉴욕으로 돌아가서 그 당시 전 세계적으로 강력한 배급권을 가지고 있던 프랑스의 영화 배급사 파테에게 작품의 배급권을 넘기고, 파테는 이후 북미와 캐나다, 그리고 전세계에 대대적인 홍보를 하여 꽤나 훌륭한 흥행 성공을 거두기도 했습니다. 헌데, 이렇듯 상업적으로 성취한 업적이 분명한, 많은 대중들에게 사랑을 받았던 이 다큐멘터리의 평가는 사실 호불호가 분명히 갈립니다.

     

    로버트 J. 플래허티

     영화감독인가? 정복자인가?

     

    첫 번째로는 이 영화의 감독인 로버트 플래허티에 대해서인데요. 그는 원래 광물 탐사를 목적으로 캐나다 북부지방을 여행하면서 에스키모인들의 생활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고 합니다.  2년여 시간 동안 이 작품에 매달려온 플래허티는 제작이 끝나자마자, 바로 뉴욕행 배에 올라탑니다. 그리고는 다시는 그 곳으로 돌아가지 않았는데요, 이때 나누크의 아내로 나왔던 쿠나유, 사실 그녀의 실재 이름은 Maggie Nujuarluktuk [누주아루툭]인데, 그때 그녀의 배속엔 5개월 된 플래허티의 아이가 자리잡고 있었고, 누주아루툭은 (플래허티가 뉴욕으로 돌아간 이후) 결국 아이를 혼자 낳아, 아이의 이름을 Josephie (죠세피)라고 짓고 혼자 키웠다고 합니다.

     

    플래허티 & 누주아루툭

     

    팩트? 연출?

     

    뿐만 아니라 플래허티는 이 영화의 주연이었던 나누크를 소위 이미지 메이킹을 했는데요, 나누크의 실재 이름은 나누크가 아니라 알라카리알락 (Allakariallak) 이었다고 합니다. [곰]이라는 뜻을 가진 나누크[nanook]는 이 작품을 촬영하면서 주어진 이름이었다고 합니다.

     

    나누크 [곰]

    당시 1900년대 초반은 산업화 시대의 절정기였던 시기로서 많은 아일랜드 계 이민자들과 이탈리아 이민자들이 본격적으로 미국으로 이민오던 때이기도 하였으며 이제 막 발명된 영화라는 동영상을 통해서 다른 나라, 또는 대도시, 또는 수 백 킬로 떨어진 오지의 이질적인 문화에 대한 호기심이 팽배해 있을 때 였습니다. 이러한 시기에 플래허티는 서구인들의 기대치를 충족시키기 위해 새로운 문화, (이제까지 익숙하지 않았던 낮선 사람들에 대한) 일반 대중들의 니즈(needs)를 정확히 충족시켜줬던 모양입니다.

     

    개봉 당시 <북극의 나누크> 포스터

     

    1920년대 미국으로 이민 온 이민자들

    당시 이런 시대적인 분위기 속에서 (영화 속에서 묘사된 것처럼) 아직도 칼을 사용하여 바다 코끼리나 물개를 사냥하는 것은 아마도 미국인들에게나 유럽인들에게는 신선한 충격이었을 것입니다. 헌데 문제는 이누이트족들은 그 당시 이미 총을 사용하여 수렵활동 중이었다고 하니, 제 생각에는 아마 다시 칼을 쥐어주며 사냥하라고 재연을 시켰을 것이고, 연기하는 나누크도 이 사람이 왜 이러지.. 생각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영화 속 바다 표범 사냥 장면

     

    고결한 야만인, (Noble Savage)

     

    문명에 오염되지 않은, 순진무구한 인간성을 지닌 인간..이라는 개념의 "고결한 야만인"이라는 용어는 원래 17세기 영국의 시인 죤 드라이든의 <그라나다의 정복>에서 처음 대두된 개념입니다.

     

    noble savage

    이 개념은 선천적으로 착한 본성을 지닌 때 묻지 않은, 자연과 가까운 원주민을 가리키는 용어인데, 문명으로부터 오염되지 않았으며 서로 돕고 화합하며 살아가는 소수 민족에 대한 존경과 낮선 시선이 공존해 있는 용어입니다. 헌데 이 개념이 20세기 초 할리우드로 넘어와서 낮선 이방인에 대한 동경과 더불어 동시에 소수 민족을 희화화하거나 어느정도 백인 우월주의의 팍스 아메리카적 시선도 담겨져 있는 용어로 사용되곤 합니다.

     

    할리우드 영화 속, <고결한 야만인>의 모습

     

    로버트 플래허티는 광산 개발자이자 탐험가였으며, 동시에 철광석 탐사 작업을 하면서 이누이트(Inuit)족에 관심을 갖게 되었던 것이며 또한 이국적인 문화에 대한 관심과 더불어 영화 흥행에도 생각이 많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는 분명 다큐멘터리라는 장르에 (진정한) 첫 발을 내딛은 감독이자 동시에 다큐멘터리라는 장르에 대해 누구보다 치열하게 고민한 인물임에는 분명합니다. 하지만 그의 영화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촬영을 위한 소위 "오픈 세트"를 지은 흔적도 보입니다. 한 예로 그 작은 이글루 안에서 촬영한 풀 쇼트(full shot)가 상당히 넓어 보이는 이유는 아마도 이글루의 반을 잘라내고 마치 세트처럼 촬영을 하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또한 나누크가 처음 보는 전축과 레코드 판을 신기한 듯 이빨로 깨물어 보는 장면은 이 영화의 압권인데 이누이트 족들은 당시 이미 레코드 사용에 대해 익숙한 상황이라고 합니다.

     

    레코드 판을 신기해하는 나누크

     

    <북극의 나누크>

     

    최초의 다큐멘터리로 기록되는 <북극의 나누크>는 다큐멘터리라는 매체가 파생시킬 수 있는 거의 모든 장점과 단점, 고민을 고스란히 내포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사에 있어 최초의 다큐멘터리라는 위대한 수식어는 여전히 이 작품의 것입니다. 비록 몇몇 장면에서 약간의 연출이 있었고 (큰 곰이라는 뜻의) 나누크라는 이름을 인물에게 부여해 이미지 메이킹을 시도했지만 이 작품의 스토리텔링 방식은 현대의 다큐멘터리의 그것과 전혀 다를바 없습니다. 장면 선택과 촬영, 편집에 있어서 어떤 이질적인 집단의 이야기에서 시작한 이 다큐멘터리는 궁극적으로 인간의 이야기, 가족에 대한 이야기로 귀결되고 있다는 점에서 <소의 눈물>과 다를바 없는 매우 보편적이며 훌륭한 다큐멘터리 작품이라 볼 수 있습니다.

     

    rapport (라뽀) 관계 형성

     

    또한 뿐만 아니라, 촬영한 푸티지(footage)를 촬영 대상과 공유하고 그들의 아이디어를 수렴하는 등 지금의 다큐멘터리 제작 방식이 이미 최초의 다큐멘터리에서 사용되었다는 것은 놀라운 부분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러한 촬영과 제작 방식은 향후 특정 민족의 생활 습관이나 역사, 문화를 탐구하는 <민족지 영화> 다큐멘터리에 대한 초석을 세웠다 해도 과언은 아닐 것입니다)

     

    <북극의 나누크> 촬영 당시

     

    더불어 앞서 말했듯이 로버트 플래허티에게 이 작품은 단지 한 순간의 호기심이나 상업적인 목적에서 만든 일회성 이벤트가 아니었습니다. <북극의 나누크>가 개봉하고 4년 후, 플래허티는 파라마운트사의 지원을 받아 남태평양에 위치한 폴리네시아로 떠나게 되고 훗날 디즈니 애니메이션의 원작과도 동일한 <모아나 Moana>(1926)라는 대단히 완성도 높은 다큐멘터리를 완성합니다.

     

    <모아나>, 1926

     

    그리고 곧 바로 플래허티는 MGM과 계약을 맺고 <남해바다의 하얀 그림자 White Shadows of the Southsea>(1928)를 필두로 1934년 제작된 <아란의 사람들 Man of Aran>까지 쉼 없이 다큐멘터리 제작에 모든 열정을 쏟아 부었습니다. 그리고 1950년 미켈란제로의 스토리 <The Titan: Story of Michelangelo>를 마지막으로 15편의 다큐멘터리 작업을 모두 마칩니다. 그는 거동이 불편했던 1951년에도 하와이에 원주민들에 대한 다큐멘터리 제작을 준비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비록 <북극의 나누크> 제작 과정에서 몇몇 재연의 문제가 있었지만 그는 평생을 다큐멘터리라는 장르에 자신의 모든 인생을 바친 위대한 작가입니다. 봉준호 감독의 말처럼 그는 “시네마라는 하나의 언어를 평생 사랑한 감독이었지 않나 싶습니다. (*아래의 사진들은 IMDB에서 발췌한 사진들입니다)

     

      편집 중인 로버트 플래허티

                                                            

    만약 아름다운 것을 보았다면, 그것을 화면에 담아라!” (로버트 플래허티)

     

    다큐멘터리 <모아나>를 신기한 듯 보고있는 소년들

     

     

    <아란의 사람들>, 1934 개봉 당시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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