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과 사는 남자 - 부모님과 함께한 그 봄날, 청령포의 두 사람에게

"나는 이제 어디로 갑니까…"


어떤 영화는 보고 난 뒤,
한참을 글이 되지 못한 채 마음에 머문다.

「왕과 사는 남자」가 내겐 그런 영화였다.

개봉 당일, 부모님을 모시고 극장에 갔다.
노부모의 옆자리에 앉아 영화를 보는 일은,
그 자체로 한 편의 작은 풍경이 된다.

객석의 불이 꺼지고, 청령포의 강물이 화면 위로 흘러갈 때,
나는 영화를 보면서 동시에
영화를 보는 부모님의 옆얼굴을 자꾸만 바라보았다.

그 두 겹의 시간을 글로 옮기는 일이
쉽지 않아, 리뷰가 자꾸 늦어졌다.


영화 정보

  • 제목 : 왕과 사는 남자
  • 감독 : 장항준
  • 출연 : 유해진, 박지훈, 유지태, 전미도, 김민, 이준혁
  • 장르 : 사극 드라마
  • 러닝타임 : 117분
  • 개봉 : 2026년 2월 4일
  • 누적 관객 : 1,663만 명 (역대 한국영화 흥행 2위)
  • 수상 · 후보 : 제62회 백상예술대상 7개 부문 후보
  • 해외 : 미국 · 캐나다 · 호주 · 대만 · 뉴질랜드 개봉, 우디네극동영화제 초청

1457년 청령포, 역사가 지우려 했던 두 사람

계유정난이 조선을 뒤흔들고,
어린 왕 이홍위는 왕위에서 쫓겨난다.

"나는 이제 어디로 갑니까…"

그가 던진 한 줄의 물음은 답을 받지 못한 채
영월 청령포를 향한 유배길로 이어진다.

한편, 강원도 산골 마을 광천골.
촌장 엄흥도는 청령포를 유배지로 만들기 위해 분주하다.
유배 오는 양반들을 안내하며 가난한 마을 사람들을 먹여 살릴 작정이다.

부푼 꿈으로 맞이한 그날.
그러나 청령포의 모래밭에 발을 디딘 사람은,
그가 기다리던 어느 양반이 아니었다.

쫓겨난 어린 왕이었다.

엄흥도는 유배지의 보수주인이 된다.
어린 왕의 모든 일상을 감시해야 하는 자리.
삶의 의지를 잃어버린 그 소년의 곁에 머무는 동안,
촌장의 마음에는 천천히 어떤 그늘이 내려앉기 시작한다.

권력의 정점에서 모든 것을 감시하는 한명회(유지태)와,
어린 왕의 복위를 끝까지 도모하는 금성대군(이준혁).
그 거대한 역사의 톱니바퀴 사이에,
아주 작고 인간적인 한 동행(同行)이 놓여 있다.


유해진과 박지훈, 그 따뜻한 거리

영화의 진짜 사건은 칼과 권력에서 일어나지 않는다.
시선과 시선이 마주치는 자리에서 일어난다.

유해진이 그려낸 엄흥도는 너무 평범해서 더 귀하다.
어수룩한 셈속, 마을을 먹여 살리려는 안간힘,
그리고 살아 있는 어떤 인간을 차마 외면하지 못하는 사람의 결.
이 모든 결이 한 사람 안에 자연스럽게 겹쳐진다.

박지훈은 이 영화의 가장 큰 발견이다.
어떤 분노도, 어떤 통곡도 없이
그저 아무 것도 남지 않은 표정 하나로 어린 왕의 무너짐을 그려낸다.
드라마 「약한 영웅」으로 인정받았던 그의 단단함이,
이번에는 가장 깊은 결의 비어 있음으로 다시 빚어졌다.

두 사람이 함께 있는 화면은 묘하게 따뜻하다.
사극의 무거움 가운데에서도, 어디선가 작은 온기가 새어 나온다.
그 온기는 영화의 모든 비극을 견디게 하는 단 하나의 빛이 된다.


장항준이라는 감독, 그가 늘 가지고 있던 결

이 자리를 빌려 솔직하게 적자면,
장항준이라는 감독을 나는 오래전부터 좋아해 왔다.

예능에서의 유쾌한 입담 뒤에는,
사람을 바라보는 따뜻한 시선과 섬세한 연출의 결이 늘 있어 왔다.

 

연도작품결
2002 라이터를 켜라 데뷔작, 따뜻한 소시민 코미디
2003 불어라 봄바람 멜로
2010 위기일발 풍년빌라 코미디
2017 기억의 밤 9년 공백 후 복귀, 스릴러
2023 리바운드 부산 중앙고 농구부 실화, 우디네 영화제 수상
2023 오픈 더 도어 미스터리
2024 더 킬러스 옴니버스
2026 왕과 사는 남자 첫 사극, 첫 천만 영화 (1,663만)

각본가로 출발했고, 「박봉곤 가출사건」(1996)으로 백상 각본상 후보에 오른 이력도 있다.
「리바운드」에서 잘 보였던 그 결 — 서로 보잘것없는 사람들이 서로를 데우는 이야기는,
이번 「왕과 사는 남자」에서 더 깊이 무르익었다.

연출에서 가장 어려운 일은 절제다.
역사의 무게를 화려한 비장미로 덮는 일은 차라리 쉽다.
그 무게를 사람의 눈빛 하나에 담는 일은 다르다.

장항준은 후자를 택했다.
그래서 이 영화는 사극의 외피를 입었지만,
끝내 사람의 영화가 된다.

장항준 감독은 56세에 처음으로 천만 감독이 되었다.
그는 늘 언더독이라 불려 왔다.
영화계의 어려운 자리에서 묵묵히 자기 결을 지켜 온 사람에게,
이 한 번의 봄은 길고 깊었을 것이다.


그날 내가 어림짐작했던 어떤 숫자

영화관을 나오던 그 봄날 오후,
나는 속으로 한 가지 짐작을 굴렸다.

"이 영화는 700만에서 800만은 무난하겠다."
"가능하다면 1000만의 문턱도 넘을 수 있겠다."

그 짐작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 이 영화는 가족이 함께 볼 수 있는 영화였다.
나의 옆자리에 앉아 계셨던 노부모의 표정이 그 증거였다.

둘째, 자극적인 매운맛에 기대지 않은 영화였다.
폭력의 강도가 아니라 마음의 결로 관객을 데려갔다.

셋째, 누구나 아는 이야기였지만,
누구도 이런 결로 느껴보지 못한 이야기였다.
단종의 비극은 한국 사람이라면 모두 안다.
그러나 촌장 엄흥도의 옆자리에서 그를 다시 본 사람은 거의 없었다.

넷째, 영화적 요소가 풍부했다.
역사극의 무게, 인물극의 섬세함, 산수의 풍광,
유머와 비애가 한 호흡 안에 모두 들어 있었다.
어려운 한국영화 시장에서, 이 정도의 균형은 흔치 않다.

극장을 나오며 나는 어림짐작했다.
1000만은 가능하겠다고.

영화는 내 짐작을 훌쩍 넘었다.

설날 연휴 5일 만에 100만, 14일 만에 손익분기점 260만 돌파.
3월 6일 천만 돌파, 4월에는 1,663만에 닿았다.
명량(1,761만) 다음의 자리,
역대 한국영화 흥행 2위.
관상이 900만에서 멈춘 이래, 사극 장르 천만의 벽이 처음으로 무너졌다.

내 짐작이 적중했다고 적기에는 부끄러울 정도로,
영화는 그 짐작의 한참 너머까지 갔다.


부모님 옆자리, 그 봄날의 풍경

이 영화가 천만을, 1500만을, 1600만을 넘긴 데는 여러 분석이 있을 것이다.
설 연휴, 캐스팅, 입소문, 사극 갈증.

그러나 영화관을 나오며 나는 다른 생각을 했다.

이 영화는 함께 본 사람을 떠올리게 하는 영화였다.

엄흥도가 어린 왕의 곁에 머무는 그 117분 동안,
나는 옆자리에 앉아 계신 부모님의 숨소리를 자주 들었다.
부모님은 단종을 보고 계셨고,
나는 그 단종을 보는 부모님을 보고 있었다.

영화는 누군가의 옆에서 누군가를 견뎌 주는 일에 관한 이야기였고,
나는 그 메시지를 부모님 옆에서 받아 안고 있었다.

이상한 일이지만, 그 두 겹의 시간을 잊지 못해
이 글이 자꾸 늦어졌다.


청령포, 영월이 다시 깨어나다

영화의 파급은 객석에 머무르지 않았다.

스크린에서 시작된 이야기는 강을 건너,
실제 청령포의 모래밭과 관음송 아래로 흘러갔다.

청령포는 본래 들어가기 쉽지 않은 땅이다.
삼면이 서강(西江)으로 둘러싸이고, 뒤편은 험준한 절벽 육육봉으로 막혀 있어
오직 나룻배로만 들어갈 수 있는 육지 속의 섬이다.
영화 속 어린 왕이 그렇게 부르며 눈물지었던 그 땅.

영화 개봉 이후 그곳의 풍경이 달라졌다.

설 연휴 닷새간 청령포를 찾은 방문객은 1만 641명.
전년 같은 기간(2,006명) 대비 5.3배의 폭증이다.
삼일절 연휴 사흘에는 1만 4,800여 명이 다녀갔다.

도선 두 척이 쉬지 않고 강을 오갔지만,
인파를 다 받지 못해 매표가 조기 마감되는 진풍경이 이어졌다.
강원특별자치도와 영월군은 합동 안전점검에 나섰고,
인명구조 장비와 승선 정원을 집중적으로 살폈다.

티머니GO의 데이터에 따르면, 영월 지역 여행상품 예약은 한 달 사이 300% 증가했다.
'영월 날씨', '영월 맛집', '영월 장릉' 검색어가 봄볕처럼 함께 피어올랐다.

영월의 발걸음은 청령포에서 멈추지 않는다.

장릉(莊陵) ─ 단종의 능침이자, 조선 왕릉 중 유일하게 강원도에 있는 곳.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이곳에는, 능을 향해 굽어 절을 하는 듯한 소나무들이 서 있다.
그 능역 안에 엄흥도의 정려각이 함께 자리한다.

호장의 정려각이 왕릉 경내에 들어선 일은 매우 이례적이다.
1969년, 정려비를 옮기기 위해 자리를 살피던 중 무지개가 장릉 능침 바깥으로 드리웠다는 전승 ─
마치 엄 호장이 살던 자리를 알려주는 것 같았다는 그 자리에
정려각이 옮겨 세워졌다.

관음송(觀音松) ─ 단종이 걸터앉아 "내가 이럴려고 왕이 되었던가" 한탄했다는 천연기념물.
망향탑(望鄕塔) ─ 어린 왕이 한양을 그리며 손수 쌓아 올린 돌탑.
한반도 지형, 선돌, 동강 ─ 영월의 오랜 풍경들.

4월의 단종문화제는 왕사남 흥행 직후 열려 역대급 인파를 모았다.
청령포와 장릉만 놓고 보아도 작년의 3배.
글로벌 축제의 반열에 올랐다는 평가가 뒤따랐다.

영화 한 편이 한 도시의 결을 바꾸었다.
아니, 보다 정확히는 ─
잊혀져 있던 결을 다시 호명한 것이라 하는 편이 옳다.

영월은 본래 단종의 땅이었다.
569년 동안 묵묵히 그 슬픔을 품고 있었던 청령포는,
영화 한 편을 만나 비로소 다시 사람들의 발길로 깨어났다.

스크린의 이야기가 진짜 풍경이 되어 우리 앞에 놓이는 일.
이 영화가 만들어 낸 가장 아름다운 사건 중 하나다.


청령포의 봄은 길었고,
그 봄을 통과한 두 남자는 끝내 역사가 지우려 했던 자리에서 다시 호명되었다.

어린 왕은 단종으로 돌아갔고,
촌장은 이름조차 흐릿했던 한 사람의 자리에서 다시 우리 앞에 섰다.

그리고 나는,
극장 불이 켜진 뒤
부모님과 함께 천천히 객석을 빠져나오던 그 봄날을
오래도록 잊지 못할 것 같다.

「왕과 사는 남자」는 그렇게,
한 사람의 옆에 또 한 사람이 앉아 있는 일의 의미를
조용히, 그러나 깊이 새겨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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