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이름은 — 78년의 봄을 건너온, 두 개의 이름
- K-Movie
- 2026. 4. 26.
"이름은 사라지지 않는다.
다만, 누군가 다시 부르기 전까지 숨을 죽이고 있을 뿐."
제주의 봄은 환하다.
너무 환해서, 잔인하다.
무용 선생 정순은 그 봄볕 한가운데 천천히 무너진다.
까닭을 모르는 채로, 몸이 먼저 알아차린다.
그녀가 닿는 자리마다, 78년 전의 그 봄이 밀려든다.
이름 하나가 깨어나려 하고 있다.



영화 정보
- 제목 : 내 이름은
- 감독 : 정지영
- 출연 : 염혜란, 김규리, 박지빈, 이소이, 심지유, 차준희
- 장르 : 미스터리 드라마
- 개봉 : 2026년 4월 15일
- 러닝타임 : 본편 + 약 5분의 엔딩 크레딧
- 공식 초청 : 제76회 베를린국제영화제 포럼 부문
두 개의 이름, 그리고 78년의 봄
1998년 제주.
한국무용을 가르치는 정순은 늦둥이 고등학생 아들 영옥을 홀로 키운다.
봄볕 아래 가끔 쓰러지는 일을 빼면, 그녀의 일상은 단정하다.
영옥은 자기 이름을 부끄러워한다.
촌스러운 두 글자, '영옥'.
지워버리고 싶은 이름이다.
그러던 어느 날, 영옥은 학급의 반장이 된다.
서울에서 전학 온 경태가 그의 곁에 다가서고,
영옥은 학교 폭력의 한가운데로 천천히 떠밀려 들어간다.
서울에서 내려온 정신과 의사 희라는 정순의 사라진 기억을 더듬어 간다.
그 손끝을 따라, 1949년 제주의 봄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잊혀진 이름이 있었다.
지켜야만 했던 이름이 있었다.
영화는 묻는다.
국가의 폭력은 어떻게 개인 간의 폭력이 되는가.
과거의 폭력은 어떻게 현재의 교실로 흘러드는가.
4·3에서 시작된 한 줄의 강은,
베트남을 지나, 광주를 지나, 1998년 제주의 한 교실에 다다른다.






염혜란이라는 사람, 정순이라는 인물
"두 번의 망설임 없이 염혜란을 떠올렸다."
— 정지영 감독
염혜란이 빚어낸 정순은 단단하다.
그 단단함의 안쪽에는, '잊으라' 명령받은 시간이 도사리고 있다.
한국무용 선생의 곧은 자세.
아들을 향한 단정한 사랑.
그리고 봄볕 아래 무너지는 몸의 떨림.
이 모든 결이 한 사람 안에 겹쳐진다.
베를린영화제 외신은 그녀의 연기를 일컬어 역사의 비극을 온몸으로 체화한 경이로운 퍼포먼스라 평했다.
과한 칭찬이 아니다.
영화는 정순의 표정 한 점, 손끝의 떨림 한 번에 한 시대의 무게를 얹는다.
「폭싹 속았수다」의 강인한 해녀 어머니에서,
이번에는 트라우마를 안고 살아가는 무용 선생으로.
같은 '제주 어머니'라는 자리에서 출발했지만, 결은 정반대다.
해리 현상으로 휘청이는 정순의 내면을,
염혜란은 큰 동작 없이 작은 호흡들로 직조해 낸다.
설명하지 않는다. 다만, 보여준다.
그리고 마지막 장면.
정순이 추는 춤.
피해자이면서 동시에 가해자가 될 수밖에 없었던 제주도민의 상처를 위로하는,
한 사람의 몸으로 올리는 진혼.
이 한 장면을 위해 영화의 모든 호흡이 쌓여 왔음을 깨닫는 순간이다.


정지영이라는 감독, 그가 걸어온 길
정지영은 1946년생, 청주 출생.
고려대 불문과를 졸업하고 김수용 감독 아래에서 조연출 시절을 보낸 뒤,
1982년 「안개는 여자처럼 속삭인다」로 데뷔했다.
그러나 그를 한국 영화사의 한 자리에 새긴 것은,
'잊혀진 자들'에게로 향한 시선이었다.
| 1990 | 남부군 | 빨치산, 금기의 이름들 |
| 1992 | 하얀 전쟁 | 베트남전쟁의 트라우마 |
| 1994 | 헐리우드 키드의 생애 | 분단과 영화광의 자전 |
| 2011 | 부러진 화살 | 사법권력의 민낯 |
| 2012 | 남영동 1985 | 국가폭력과 고문 |
| 2019 | 블랙머니 | 금융자본의 어둠 |
| 2023 | 소년들 | 삼례 나라슈퍼 사건과 누명 |
| 2026 | 내 이름은 | 제주 4·3, 그리고 호명 |
청룡영화상 감독상, 도쿄국제영화제 그랑프리, 백상예술대상 대상 ─ 상의 무게도 가볍지 않다.
그러나 그의 진짜 이력은 수상 이력이 아니라, 무엇을 기억하기로 결심했는가의 목록이다.
빨치산. 베트남 참전 용사. 고문 피해자. 금융 비리의 약자. 누명 쓴 소년들. 그리고 이번엔, 제주의 어머니.
그의 카메라는 늘 같은 자리를 향해 있다.
역사가 지운 이름, 사회가 잊으라 한 사람.
80을 앞둔 노장이 다시, 제주의 봄을 향해 걸어 들어간다.
[이미지 — 정지영 감독 연출 현장 또는 인터뷰 컷]
9,778개의 이름으로 완성된 엔딩 크레딧
이 영화의 마지막 5분은, 그 자체로 한 편의 작품이다.
9,778명.
크라우드 펀딩으로 「내 이름은」의 제작에 참여한 시민들의 숫자다.
그들의 이름이 한 줄 한 줄, 5분 동안 흐른다.
염혜란은 베를린에서 이 크레딧을 처음 마주한 순간을 회고하며 말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일어나 자기 이름을 들어 올리는 것 같았다고.
'덜 외로운 느낌이었다'고.
이름을 잃었던 한 여자의 이야기가,
이름을 새긴 만 명에 가까운 시민들의 손으로 완성된다.
이 영화는 제주 4·3을 다룬다.
그러나 더 정확하게는,
이름을 빼앗긴 모든 시간을 다룬다.
봄은 다시 온다
어떤 이름은 너무 오래 불리지 못해 잊혀진다.
또 어떤 이름은, 너무 오래 잊혀서 마침내 다시 불리기를 기다린다.
봄볕은 언제나 다시 온다.
1949년의 봄도, 1998년의 봄도, 그리고 2026년의 이 봄도.
「내 이름은」은 그렇게,
78년을 건너온 한 여자의 이름을
우리 앞에 조용히 내려놓는다.
당신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그 물음 앞에서, 영화는 끝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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