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음악 불멸의 거장, 버나드 허먼
- OST
- 2021. 4. 18.
극장의 불이 꺼지고 어두운 암전에서 화면이 밝아지면 솔 바스의 그래픽 디자인이 마치 성난 촛불처럼 맹렬히 좌우로 춤을 춘다. 이내 귀를 찢을 듯이 날카로운 바이올린 음이 신경질적으로 무한 반복되면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단숨에 관객들은 순진한 양처럼 버나드 허먼이 안내하는 저 깊고 어두운 미지의 세계로 따라 들어가게 된다.
언젠가 영국 음악 저작권 협회가 영화인들을 대상으로 ‘영화 역사상 최고의 공포영화 OST’를 조사한 적이 있다. 그 당시 <엑소시스트>, <컨저링> 등 여러 무시무시한 공포영화 음악들 중 ‘The Murder’가 1위로 뽑힌 적이 있다. 그리고 “The Murder"는 다들 아시다시피 <싸이코>의 음악감독 버나드 허먼의 솜씨이다. 영화 <싸이코>가 제작된 1960년대 초, 그 당시까지만 해도 영화 음악이라고 하면 오케스트레이션을 작곡하고 지휘할 수 있는 음악 감독들이 대부분이었고 그들 중 대다수는 현악기, 그 중에서도 대중들의 신경을 불편하게 하는 음역대는 사용하지 않았다. 하지만 버나드 허먼은 과감하게 기존의 불문율을 깨뜨리고 날카로운 바이올린이 파생하는 불협화음을 통해 그 유명한 <싸이코> 샤워 씬의 음악을 만들어낸 것이다.
1911년 6월 29일 뉴욕 시 출생의 버나드 허먼은 어릴 적부터 바이올린 영재 교육을 받았다고 한다. 알프레드 히치콕 감독의 <너무 많이 아는 남자>에서는 지휘자로 등장하기도 했던 그의 경력은 당시 CBS의 음악부장 로니 그린 (Roney Green)에게 스카우트되어 라디오 드라마와 다큐멘터리 음악을 담당하며 시작되었다. 이후 오손 웰슨의 전설적인 1941년 데뷔작, <시민 케인>의 음악을 작곡하며 영화 음악감독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흔히들 영화 <시민 케인>은 세 명의 천재에 의해 만들어졌다 말한다, 연출자인 오손 웰즈, 그리고 전체 심도를 깊게 촬영하는 딥 포커스 기법을 발전시킨 그레그 톨랜드 촬영감독, 그리고 얼마 전 넷플릭스에서 영화로도 만들어진 천재 시나리오 작가 허먼 J. 맹키위츠, 이렇게 세 사람의 천재들에 의해 만들어진 영화라고 한다. 하지만 내 생각에 그 리스트에는 당연히 한 사람이 더 추가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바로 버나드 허먼이다.
버나드 허먼은 당시 일반적인 할리우드 음악 감독들이 사용하는 오케스트라 연주를 자신만의 스타일로 변형해 만들어내는 재주가 특별했다. 많은 대중들에게 그의 이름을 각인시킨 작품 <싸이코>에서는 앞서 말한바와 같이 소규모의 현악기로만 대부분의 음악을 작곡했고, 마치 소용돌이가 어지럽게 물결치는 듯한 <현기증>의 테마 음악 역시 오스티나토 기법만을 사용해 완성해냈다. (오스티나토 Ostinato ; 어떤 일정한 음형(音型)을 같은 성부(聲部)에서 같은 음높이로 계속 되풀이하는 기법),
히치콕 감독은 평소 “히치콕 사단”이라 불리우는 일련의 영화 스태프들과 오랜기간 함께 작업해 왔는데 물론 가장 오래된 동료는 당연히 아내이자 공동 작가이기도 했던 앨머 레빌일 테고, 그 다음은 앞서 언급했던 타이틀 디자인의 대가 솔 바스 (Saul Bass), 그리고 의상 디자이너 이디스 헤드와 오랜 기간 작품 활동을 함께해왔다.
하지만 히치콕 감독의 작품들 중 감독인 히치콕 본인 말고 히치콕 영화들에 있어 가장 큰 지분을 차지하고 있는 스태프를 꼽으라면 단연코 버나드 허먼이라 할 수 있다. 버나드 허먼은 히치콕 감독과 무려 일곱 편을 작업했다, <해리의 소동>, <너무 많이 아는 남자>, <오인>, <현기증>,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 <싸이코> 그리고 <새>. 많은 대중들은 스티븐 스필버그와 죤 윌리엄스를 최고의 감독-음악감독 콤비로 기억하지만 히치콕-버나드 허먼 역시 분명 영화 역사상 최고의 감독-음악감독 콤비로 기억될 것이다.
개인적으로 버나드 허먼의 여러 위대한 영화 음악들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음악은 앞서 언급한 <현기증>에서 사용된 “메들린의 테마”이다. 영화 <현기증>은 프랑스의 작가 피에르 부왈로와 토마 나르스자크의 소설 “죽음의 입구”(1954)를 바탕으로 각색된 작품인데 자신의 실수로 살인을 했다고 믿는 스카티라는 전직 형사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이 작품은 소위 타인의 심리적 장애를 범죄에 이용하는 이야기이기도 하며 경관을 구하지 못한 스카티의 두 번째 기회에 대한 영화이기도 하다. 작품 속에서 스카티는 쥬디라는 살아있는 사람을 통해 죽은 여인의 이미지를 재현하려고 한다.
사실 영화 <현기증>은 그렇게 쉽게 볼 수 있는 영화는 아니지만 이 작품 안에는 히치콕 감독의 정수를 느낄 수 있는 그가 선호하는 모든 레시피가 들어있다. 스릴러 장르라는 커다란 우산 아래, 살짝 맛이 간 듯한 주인공 캐릭터, 죄의식이라는 키워드, 자신이 저지르지 않은 죄를 뒤집어쓴 남자가 누군가 (또는 무언가)에게 쫓기는 플롯, 그리고 다소 변태적인 성향 (여기서는 네크로필리아적인 코드까지 포함되어 있다). 이런 히치콕 감독의 다소 그로테스크한 영화에 전체적인 균형을 훌륭하게 조율해주는 것은 단연 버나드 허먼의 음악일 것이다. 때로는 대사처럼, 때로는 효과음 또는 폴리 사운드처럼 허먼의 <현기증>의 OST는 무려 서른 개가 넘는 곡으로 구성되어 있다.
Prelude / 지붕 / J.C.바흐의 Sinfonia Opus. 9/2, 2악장
창문 / 매들린 / 꽃집
수도원 / 묘지 / 캐로타의 초상화
복도 / 미술관 / 샌프란시스코 만 (The Bay)
잠 / 벽난로 옆에서 / Exit
거리 / 방랑 / 숲
바닷가 / 새벽 3시 / 꿈
작별 / 종탑 / 악몽
모짜르트 교향곡 No. 34, / 공원 / 머리 색
사랑의 장면 (D’amour) / 목걸이 / The Return
피날레
아마 대중들에게 가장 잘 알려진 곡은 스카티가 현기증을 느끼는 순간마다 나오는 Vertigo의 화음일 것이다. 하지만 이에 못지않게 인상적인 음악을 하나 더 꼽으라면 나는 주저없이 매들린 [메인 모티브]를 추천할 것이다. [메들린의 테마]는 처음 스카티가 고급 레스토랑에서 메들린을 처음 만날 때 사용된다. 이 장면에서 카메라는 붉은 벽을 따라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느리게 패닝하다가 마침내 멈춰서 엘스터와 함께 테이블에 앉아있는 아름다운 금발 여성(마들렌)의 뒷모습을 롱샷으로 잡는다. 그리고 낭만적인 음악이 서서히 흘러나오고 카메라가 약간 옆으로 이동한다. 이때 [메들린의 테마]가 흐르고 마치 귀신에라도 홀린 듯 스카티는 메들린에게 첫눈에 반한다.
만약 앞서 사용된 오스티나노 음형이 매들린에게 사로잡힌 스카티의 벗어날 수 없는 (빙빙 돌고 있는, 사로잡혀 있는) 그의 처지를 영화 내내 묘사하고 있다면, [메들린의 테마] 음악 역시 그녀에게서 벗어나지 못하는 스카티를 간접적으로 표현해준다. 영화 <현기증>에서는 스카티와 메들린이 만나는 거의 모든 장면에서 앞서 흘러나왔던 [메들린의 테마] 음악이 아주 조금씩 변형된 상태로, 마치 스카티를 영원히 사로잡을 듯이 모든 장면의 배경음악으로 깔린다. 스카티가 메들린을 미행할 때, 꽃집에서, 묘지에서, 바다에 뛰어든 그녀를 구한 뒤 찾아간 그녀의 아파트에서도, 그리고 망루에서 그녀와 키스하는 씬에서도.. (이러한 메들린 테마의 변주는 스카티가 미술관에서 캐로타의 초상화를 볼 때 역시 매들린의 테마의 반음진행의 형식으로 배경에 흘러나온다).
버나드 허먼 영화 음악 인생의 1기는 오손 웰즈와의 시절이라 볼 수 있을 것이고, 만약 2기가 히치콕 감독과의 1960년대의 경력이라면 허먼 음악의 3기는 아마도 프랑소와 트뤼포와 마틴 스콜세지와의 작업일 것이다. 히치콕 감독과 1966년 <찢어진 커튼> 작업 당시 대립해 이후 영원히 갈라선 버나드 허먼은 누벨바그의 기수 트뤼포의 열렬한 러브콜을 받으며 <화씨, 451>의 음악 감독으로 초빙된다. 프랑소와 트뤼포의 <화씨 451>은 레이 브래드버리가 쓴 동명의 SF 소설을 각색한 작품으로서 금지된 책을 찾아내 불을 지르는 사람들 (방화수)을 주인공으로 다룬 영화이다. 이 영화에서 역시 버나드 허먼은 매우 적은 악기 편성만으로 작품의 디스토피아적 세계관을 훌륭하게 묘사해내고 있다.
이후 버나드 허먼은 그를 영원히 기억하게 만들 스콜세지의 역작 <택시 드라이버>의 음악 감독으로서 다시 그가 태어난 뉴욕으로 돌아온다. 영화 <택시 드라이버>는 제작된지 무려 45년이 지났지만 지금 다시 봐도 전혀 어색하지 않은 완벽한 비주얼과 음악의 조화를 보여준다. 이제 막 월남전에서 돌아온 트래비스는 거지, 창녀, 마약쟁이 등 온갖 쓰레기로 가득한 도시의 밤거리를 오늘도 눈을 희번덕거리며 유영하고 있다, 그는 때로는 자신을 이 비정한 도시의 피해자로 때로는 자신만이 이 타락한 도시를 구원할 구원자로 생각하며 오늘도 차가운 빈 깡통 (택시) 안에서 뉴욕의 밤거리를 운전하며 다음 손님을 찾는다. 마치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 속 한 장면을 그대로 스크린으로 옮겨놓은 듯한 영화 <택시 드라이버> 속 장면들에 버나드 허먼의 그 부드럽고 몽환적인 섹소폰 음악이 흐르는 장면은 우리가 왜 영화를 보는지에 대한 모든 이유를 설명해 준다.
버나드 허먼은 마틴 스콜세지와의 작업이 유작이 되었고 이후로는 더 이상 그의 천재적인 음악을 들을 수 없게 되었다. 돌이켜보면 버나드 허먼은 이후 모든 위대한 음악감독들의 원형(archetype)이 되지 않았나 싶다. 위대한 한스 짐머도, 죤 윌리엄스도, 대니 앨프만도, 모든 위대한 음악 감독들은 버나드 허먼이 걸어온 길을 뒤따를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영화에서 음악의 기능은 때로는 작품의 여운을 마치 화석처럼 포착하는 것을 가능케도 해주며 또 때로는 캐릭터를 압축해 표현하기도 하며, 때로는 작품 전체의 전반적인 톤을 세팅해주기도 하며 또 때로는 플롯이나 배우에 의해 표현되지 못한 분위기를 연출해 주제를 강화시키는 역할까지 담당한다. 이런 다양한 영화 음악의 가능성을 아마도 버나드 허먼보다 더 혁신적이고 창의적으로 해석한 사람이 또 있을까 문득 궁금해진다...
버나드 허먼은 위대한 영화, <택시 드라이버>의 음악 작업을 마치고 1975년 12월 24일 뉴욕의 한 호텔에서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난다. (참고로 <택시 드라이버>는 1976년 2월 8일 개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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